[칼럼] 그란데 밀란 : 아리고 사키의 발자취 그리고 시스템

스포츠분석

[칼럼] 그란데 밀란 : 아리고 사키의 발자취 그리고 시스템

연둬잪러1 0 749 2020.10.29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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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란데 밀란 : 아리고 사키의 발자취 그리고 시스템





아리고 사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하나로 손꼽히지만 시작은 아주 보잘 것 없었다. 이탈리아 아벤나 지방의 인구 7,000명의 푸시냐노(fusignano) 마을에서 태어난 사키는 축구를 좋아했지만, 축구를 할 상황도 실력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신발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사키는 축구 선수 대신, 축구 감독 일을 하기로 한다. 그렇게 사키는 축구계에 발을 들여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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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로서 사키는 철저하게 무명이었다.



사키의 축구 가치관은 분명했다. “볼을 잡지 않은 선수가 볼을 잡은 선수만큼 중요하며, 축구는 11명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만들어내는 역동적인 시스템에 관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키의 나이가 감독 일을 하기엔 너무 어렸던 탓에 자기보다 족히 10살은 많았던 팀의 선수들에게 시스템과 철학을 주입하기엔 무리였다.

더군다나 이 시기엔 네레오 로코, 엘레니오 에레라의 찬란한 성공으로 인해 대부분의 이탈리아 팀이 어떻게 수비할 것인가에 중점을 두었다. 공격은 단지 공격수의 능력과 플레이메이커의 창의성으로 귀결 되는게 전부였다. 허나 아리고 사키의 마음을 빼앗은 건 혼베드, 레알 마드리드, 브라질, 그리고 결정적으로 1970년대의 네덜란드였다. 모두 훌륭한 패스게임을 하면서 선수간의 상호 움직임을 중요시하는 팀이었다. 간단히 말해 사키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여, 공격적인 팀에 호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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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털 풋볼" 1974 네덜란드 대표팀



“역사상 위대한 클럽은 시대와 전술에 상관없이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경기장을 소유했고, 볼을 점유했다. 다시 말해 공을 가지면 플레이를 지배하고, 수비할 때는 공간을 점유했다.” 사키는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주도적인 축구, 심미적인 축구에 대해 연구했다.

열심히 정진하던 사키는 1985년 세리에 C1의 파르마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는데, 부임 첫 해 34경기 14실점만을 하면서 팀을 세리에 B 무대로 올려 놓는다. 이듬해 아쉽게 세리에 A 승격에 실패하지만, 코파 이탈리아에서 밀란을 두 번이나 꺾는 이변을 연출한다. 당시 밀란은 “언론 재벌”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막 인수를 한 팀이었고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 애쓰고 있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이런 사키를 감명깊게 지켜봤고 본인이 막 인수한 팀이 사키의 손에서 위대해 질 것을 내다봤다. 사키는 그렇게 1987년 여름, 밀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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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사키의 명언


하지만 언론들은 시골 출신이자, 무명의 선수 출신 사키가 팀 재건을 위해 몸부림치는 밀란을 이끌기에는 부족하다고 혹평을 쏟았다. 사키는 감독 부임 후 첫 훈련에서 이 문제를 정면으로 돌파하기로 한다.

“나는 푸시냐노라는 작은 마을에서 왔지만, 여러분은 무엇을 이루어 놓았는가? 말을 이끄는 기수가 경주마로 태어났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발언이었고, 이는 선수들과 클럽에게 신뢰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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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적인 "오렌지 트리오"



팀은 빠르게 강해졌다. PSV 아인트호벤으로부터 루트 굴리트를, 아약스로부터 마르코 반 바스텐을 영입했다. 첫 시즌인 1987/88 시즌에 바로 스쿠데토를 따냈다. 비록 반 바스텐은 계속해서 부상에 시달리며 3골에 그쳤지만, 비르디스와 굴리트가 각각 11골과 9골을 기록하며 공격진을 책임졌고 탄탄한 수비력을 기반으로 리그에서 팀은 단 두 번의 패배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 다음 시즌인 1988/89 시즌에는 아약스 소속으로 스포르팅 리스본에 임대되었던 프랑크 레이카르트를 영입하며 전설적인 “오렌지 트리오”를 완성시켰다. 비록 리그에선 왈테르 젱가, 로타어 마테우스, 안드레아스 브레메가 버티는 인테르와 디에고 마라도나가 이끄는 나폴리에게 밀리며 3위에 머물지만, 유러피언 컵 (현 UEFA 챔피언스리그)에선 우승을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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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알 마드리드는 산시로에서 5-0으로 박살났다


당시 밀란은 4강전에서 에밀리오 부트라게뇨와 우고 산체스를 앞세운 레알 마드리드를 만났다. 그간 레알 마드리드는 23년간 유러피언컵 트로피가 없었고, 의욕을 불태웠지만 밀란에 1,2차전 합계 6-1로 패배했다. 결승전은 더 싱거웠다. 슈테우아 부쿠레슈티를 만나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4-0 승리를 거두며 밀란 역사상 3번째 빅이어를 들어올렸다.

아리고 사키는 이 날의 경기를 이렇게 회상한다.

“슈테아우아를 꺾은 다음날 아침,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낯선 기분으로 깨어났다. 입 안에 묘한 단 맛이 돌았다."


"그때 느꼈다. 아, 지금이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구나.”

밀란은 그야말로 위대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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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피카를 만나 유러피언컵 2연패 달성



1989/90 시즌에는 다시금 마라도나의 나폴리에 밀리며 스쿠데토를 내줬지만 놀랍게도 또 다시 유러피언 컵 결승에 도달했다. 결승에서 벤피카를 만났고, 레이카르트의 결승골에 힘 입어 믿기 힘든 유러피언 컵 2연패를 달성했다. 밀란은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강한 팀이었다. 허나 이전 시즌과 같은 확신을 주진 못했다.


그렇게 1990/91 시즌은 다소 어수선한 상태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반 바스텐은 사키와 불화가 있었고, 이탈리아 축구협회는 1994 미국 월드컵을 향한 아주리 감독으로 사키를 공공연히 거론했다. 밀란은 파비오 카펠로를 선임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점점 밀란에서 사키의 시간을 끝이 나고 있었다.

특히 찬란한 성적을 내고 있었던 유러피언 컵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 마르세유와의 8강전, 홈에서 열린 1차전을 1-1로 비긴 밀란은 2차전을 0-1로 지고 있었다. 경기 종료 2분 전, 조명탑이 고장 났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불이 다시 들어왔지만 밀란은 경기장을 떠나버렸다. UEFA는 마르세유의 3-0 승리를 선언했고, 밀란에게는 한 시즌 유러피언 컵 출전 정지가 선고됐다. 시즌이 끝나고 사키는 밀란을 떠나 이탈리아 대표팀의 감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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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동안 리그 우승 1회, 챔피언스리그 우승 2회, UEFA 슈퍼컵 2회 수페르코파 이탈리아 1회, 도요타컵(클럽월드컵 전신) 2회 우승



아리고 사키는 밀란에서 단 4시즌을 보냈다. 뒤 이어 1996/97 시즌에 돌아왔지만 큰 임팩트 없이 한 시즌 만에 팀을 떠났다. 허나 4시즌 간, 누구보다 강렬하게 불타올랐다. 아르헨티나와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 호르헤 발다노는 말했다.

“비록 파비오 카펠로의 밀란이 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아리고 사키의 밀란을 우리는 더 기억한다. 밀란은 축구의 위대함을 여실히 보여준 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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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당대 밀란 전술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사키가 훈련 세선에서 강조한 것은 “짧은 팀(Short Team)”이었다. 사키는 수비 라인과 공격 라인 사이의 공간을 좁히도록 지시했다. 극단적으로 공격적인 오프사이드 트랩을 사용함으로써 상대가 뒷 공간에서 플레이 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고 트랩을 뚫으려면 줄줄이 세 개의 벽을 무너뜨려야 했다.

“이렇게 하면 힘을 덜 쏟고도 먼저 볼을 차지하고 지치지도 않는다. 만일 우리가 수비수부터 최전방까지 25미터 사이에서만 플레이를 하면 우리의 능력을 감안할 때 결코 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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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고 사키 밀란의 유명한 오프사이드 트랩. 공격적으로 달려들어서 상대 선수의 심리적 위축을 이끌어낸다.


결론적으로 좁은 공간 속에서 행해지는 팀 단위의 압박, 그것이 사키의 밀란을 강하게 만들었다. “모든 선수가 알맞은 자리에 있어야 했다. 수비 시에는 언제나 네 가지를 염두에 두었다. 1. 공, 2. 공간, 3. 상대, 4. 동료. 모든 동작은 네 가지 기준에 맞춰 일어나야 했다.”

“압박은 공간을 휘어잡는 것이다. 우리는 강하다고 느끼도록 하고, 상대는 스스로 약하도록 느끼게 만드는 것. 그렇다. 압박은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심리적이기도 하다.”

“우리의 압박은 늘 집단적이어서 11명 모두가 “적극적”인 위치에 있음으로써 우리 볼이 아닐 때 오히려 상대에 효과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모든 움직임은 상승작용을 일으켜 팀 전체의 목표에 맞아떨어져야 한다.” 선수들간의 상호 이해가 필수적이었다. 그가 밀란에 접목시킨 시스템은 아직 현대 축구에서 그대로 실현하고 있는 것들이다.

(물론 아리고 사키의 전술적 철학도 70년대 네덜란드 리누스 미헬스의 철학을 참고하였으며 그에 대한 연속성을 충분히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사키는 이를 발전시켜 좀 더 세부적으로 설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키의 축구에서는 시스템이 가장 중요했다. “축구는 대본이다. 배우가 훌륭하다면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하여 대본과 대사를 주체적으로 해석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대본을 따라야 한다. 나의 철학은 내 능력껏 선수를 가르쳐 자신들이 최대한 많은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모든 시나리오를 토대로 매우 빠르게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엄격한 시스템이야말로 사키의 축구의 본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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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의 본사 Casa Milan의 트로피 룸


사키의 밀란은 수 없이 많은 유산을 현대 축구에 안겨줬다. 발다노의 말대로 그들의 축구는 위대했고, 아름다운 팀이었다.

사키는 말했다. “나는 솔로 아티스트를 원하는게 아니라 오케스트라를 원했다. 내가 받은 최고의 찬사는 내가 구사하는 축구가 음악 같다고 말할 때였다.”

의심의 여지없이 사키의 밀란은 황홀한 오케스트라였다.






그란데 밀란의 포메이션.png [칼럼] 그란데 밀란 : 아리고 사키의 발자취 그리고 시스템

당대 밀란의 포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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